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제프 2세 (문단 편집) === 단독 통치기 === [[1780년]] 11월,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망하자 마침내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전제적 [[계몽주의]]에 입각한 개혁정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보여준 합스부르크 제국의 국가적 한계를 체험한 그는 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개혁은 당시에는 굉장히 진보적이었는데, [[1781년]], [[농노]]를 해방하고 상공업을 장려하여 해방된 농노에서 얻은 세수 기반의 경제 정책을 시행하였다. [[1784년]]에는 [[라틴어]]가 신민들의 언어로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헝가리 왕국]] 의회에서 [[독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도록 했으며[* 왜 [[헝가리어]]가 아닌가 하면, 당시 헝가리 왕국의 영토는 지금의 헝가리 영토보다 훨씬 방대했기 때문에 [[헝가리인]] 외에도 [[슬로바키아|북부]]의 [[슬로바키아인]], [[자카르파탸|트란스카르파티아]]의 [[루신인]]과 [[우크라이나인]], [[트란실바니아|에르데이]]의 [[루마니아인]], [[보이보디나 자치주|남부 국경지대]]의 [[세르비아인]] 등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었고, 수 세기에 걸쳐 이주한 [[독일인]] 등도 있었기에 헝가리어가 아닌 오스트리아에서 사용하는 독일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려 했다. 물론 이는 제국 전반에 걸쳐 언어를 단일화하여 오스트리아와 [[빈(오스트리아)|빈]]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국가를 수립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한마디로 과거 소수민족들의 문화와 자치를 존중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방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정책을 펼친 셈이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합스부르크 제국]]의 공용어가 독일어로 변경되었다.[* 헝가리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하지 않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였다.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이나, 독일계와 독일어를 쓰는 귀족들이 다수 있던 보헤미아 왕국은 굳이 독일어를 의무화할 필요가 없었고, 헝가리 왕국 하나에만 독일어 사용을 의무화한 것이 아닌 헝가리 왕국을 시발점으로 하여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부코비나 공국]] 등 합스부르크 제국 전체에 독일어 사용을 의무화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예술과 학문을 부흥시키고 중앙집권제도의 강화 및 행정제도의 개편 등에 있어 다방면에 걸친 개혁을 단행했다. [[1787년]]에는 [[사형]] 제도를 폐지하고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등의 잔인한 형벌을 금지했으며, 이는 그의 사망 후인 [[1795년]]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요제프 2세는 가톨릭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제어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대표적인 정책이 바로 [[1781년]]에 실시한 종교 관용령(Toleranzpatent)이다. 이 정책을 통해 [[예배]]의 자유를 보장하였으며,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도 [[유대교]], [[정교회]], [[루터파]], [[칼뱅파]] 등 국교인 가톨릭 이외의 종교를 믿는 것이 가능해졌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는 다르게 [[유대인]]에게도 다소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 유대인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치기 위한 학교를 설립할 것을 허가하는 등 법제적으로는 유대인들이 더 이상 눈치를 보며 살 필요가 없어졌다. 때문에 그의 공적을 기려서 [[프라하]]의 유대인 거주지역은 그의 이름을 따 '요제포브' 혹은 '요제보브'라고 불린다. 그는 [[프리메이슨]]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자기가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1738년 이래로 가톨릭 신자가 프리메이슨에 가입시 파문을 당하며, 21세기에도 유효하다. 즉, 가톨릭 국가의 군주가 가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제프 2세의 개혁정치는 제대로 된 기반 없이 성급히 행해졌던 것이었기에 상당수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반대로 내부의 혼란만 가중되는 결과를 빚었다. 중앙집권정책과 독일어 공용화는 예로부터 지방간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자치가 행해졌던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귀족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세속주의 정책도 가톨릭 [[사제(성직자)|사제]]들에게 큰 반발을 사 국내의 지지를 잃어버렸고 후술하듯 각 지방의 [[반란]]이 잇달았다. 한마디로 의도는 좋았으나 '''목표만 높았던 현실감각 없는 군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1772년에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과 함께 [[폴란드 분할|폴란드를 분할]]했으며 1774년에는 [[오스만 제국]] 산하 봉신국인 [[몰다비아 공국]] 북부를 점령하여 이듬해 양도받아 [[부코비나 공국]]을 수립했다. 둘 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생존해 있던 공동통치기간의 일인데, 마리아 테레지아는 폴란드 분할이나 오스만 제국과의 충돌 등 영토 확장에는 다소 소극적이었고 주로 요제프 2세의 주도로 추진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그는 독자적으로 [[대서양]]으로의 해양 진출을 꾀하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현재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1781년에는 러시아 제국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와 동맹을 맺어 [[오스만 제국]]령 [[발칸 반도]]를 분할하기로 합의하여 1788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전쟁에 나섰으며, [[바이에른 계승 전쟁|바이에른의 병합]]까지 시도했다. 그러나 요제프 2세의 대외정책은 실패로 얼룩졌다. 전염병의 창궐[* 전선을 시찰하던 요제프까지 말라리아에 걸렸을 정도다.]과 반란[* 네덜란드와 헝가리에서 반란이 일어났다.]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나 반란의 확산과 프로이센의 압력으로 인해 모든 점령지를 반환하고 철수해야 했다. 바이에른 병합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 제후국가들의 반발로 결국 포기해야 했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력 강화는 현지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켜 폭동이 일어났다. 특히 [[프랑스 혁명]] 발발 이후의 네덜란드 지역은 혁명의 영향을 거세게 받으며 독립을 선언하면서 그의 네덜란드 정책도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은 요제프 2세에 대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우려가 옳았던 셈이다. 그가 섣불리 추진했던 개혁들은 대부분 실패하고 역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을 약화시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요제프 2세를 무조건 무능하다고 볼 수 없으며, 그의 개혁은 죽음 직후 후퇴된 것을 제외하면 장기적으로는 결실을 맺었다. 특히 그가 이 정도의 개혁이라도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합스부르크 제국이 분할되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전철을 밟았을지도 모른다. 특히 중앙집권화에 실패하고 지방 귀족들의 이권에 휘둘려 국가까지도 해체되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와는 달리, 합스부르크 제국은 나중에 [[오스트리아 제국]]을 거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재편될지라도, 오스트리아 중심의 우위를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다. 요제프 2세의 실패로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능가하지는 못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해체되기 전까지 다민족 국가로서의 중심을 세우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계속된 실패로 인해 요제프 2세는 심신이 피폐해지기 시작했고 말년에는 [[프랑스 왕국|프랑스]]에서 터진 [[프랑스 혁명|혁명]]의 영향력을 차단하는데 주력했다. 결국 [[1790년]] 1월, [[개혁]]을 중단한다고 선언했고 나중에는 건강까지 악화된 터라 2월 들어 49세의 나이로 빈에서 사망했다. 지치고 낙담한 그는 자신의 묘비명을 "여기 모든 것에 실패한 요제프 2세가 눕다"로 세기게 했다. 유언은 '''"온 [[유럽]]에 항구적인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노라."'''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